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10-12-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 날마다 읽은 소설 중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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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아마도 살아가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찬사는 "내 옆에는 네가 있어"라는 말이 아닐까요. 방바닥에 태양계의 그림을 그리든, 공원을 걸어가면서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말하든, 그게 아니라면 지금 창 밖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을 가리키든, 어떤 식으로든 "마찬가지로 지금 내 옆에는 네가 있어"라고 말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세요.

 

p40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문학과지성사

"언젠가 누가 그랬어.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 섰다면, 그땐 이미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p59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무엇을 느꼈는지 쓰지 말고,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사랑했을 때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 다시 한 번 더 걷고, 먹고, 보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형식적인 것들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시고, 잊지 못할 음식을 드시고, 그날의 기온과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형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 강의 끝.

 

p83

그냥 외로운 거하고 이상하게 외로운 거하고는 좀 다르다는 거 아시지요? 모르신다면, 이렇게 설명해볼까요?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와 혼자 문을 닫고 방에 들어와 있으면 아, 너무 좋아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이건 그냥 외로운 거예요. 이건 친구와도 같은 외로움이죠. 그러니 저 역시 누가 나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p91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혹은 절대로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면? 그냥 무시하세요. 반대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러분도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그가 몰두하는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참견하지 마세요. 말해봐야 그 사람도 여러분의 말을 무시할 게 뻔하니까.

 

p94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오히려 쉽다고 생각해서 더 고생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런 기대일랑은 깨끗하게 접었습니다. 편해 보이는 길과 힘들어 보이는 길이 있으면 무조건 힘들어 보이는 길을 택했습니다. , 고민할 게 없어서 좋더군요. 그 뒤로 지금까지는 별 불만이 없어요. 역시 아큐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그게 죽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우린 우리 나름의 방식대로 죽을 권리가 있답니다. 남들처럼 살기도 싫지만, 남들처럼 죽기도 싫어요. 저 멋진 아큐처럼.

 

p96

국화주에 취한 소숙헌이 어수선함과 진지함을 번갈아 탔다. '吉人醉 善心露, 躁人醉 悍氣布'(길인취 선심로, 조인취 한기포)라 해서 좋은 사람은 술에 취하면 착한 마음이 나타나고 조급한 사람은 술에 취하면 사나운 기운이 나온다고 했다. 술기운에 문득문득 모자라고 헤벌어진 모습들이 비어져 나오기도 했지만 자부심이 강한 사내들이요, 명료한 지성들이었다. 반성이 뒤를 이었고, 이해하고 위로하면서 자신들만의 붕우유신을 실천했다. 내친김의 책선이기도 했다. 친구의 잘못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선한 행동을 권하는 책선은 친구 사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도이다.

 

p109

마침내 출발 신호가 울리고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멋지더군요. 그러니까 세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그 다음부터는 뭔가 불길한 기운이, 온 우주가 나를 막아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주 전체가 저를 밀어대는데, 제가 무슨 수로 완주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첫 시도에서 그만 저는 달리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외롭고 또 야속하더군요. 저 하나 완주하는 걸 막으려고 온 우주가 동원되다니요. 그 다음 몇 달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완주할 수 있을까? 그 다음 대회에서 저는 그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저는 완주했으니까. 뭔가가 우리를 막아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그걸 뚫고 지나가는 일입니다. 계속 달리세요, 끝까지. 멈추지 말고, 계속 움직이세요.

 

p144

"책을 쓸 때 마지막 장면을 이미 알고 있다면 쓸 마음이 나겠는가? 글쓰기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그렇다면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입니다. 위안을 삼을 수 있는건 이런 겁니다. 작가들의 식탁 다리를 괴고 있는 작품들 중에 위대한 작품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작가들은 모두 위대한 작품을 썼습니다. 그렇다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보지 않은 삶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사는 삶이 위대해질 거예요. 그냥 그렇게 믿어버리세요.

 

p146

저는 순간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그 짧은 찰나 말이죠. 처음으로 꺼내 입은 스웨터에서 옷장 냄새가 훅 풍기던 순간, 달리기를 한 뒤에 등을 수그리고 심호흡을 할 때 이마의 땀이 운동장 바닥으로 뚝 떨어지던 순간, 작업실 창 옆으로 새 한 마리가 휙 날아가던 순간. 그런 순간들 속에 나의 삶을 결정짓는 모든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짧은 순간도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기나긴 인생이란 결국 그런 순간들의 집합체죠.

 

 

p148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이지민, 문학동네

넓은 줄만 알았던 골목길이 좁아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니까. 어른에게만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린아이처럼 많이 걷고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걷지 않으니 추억이 없고 그래서 늙는 것이다. 바람과 공기의 입자 속에 숨은 시간의 힘을 느끼기 위해 여기까지 온 그를 나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행여 그가 이 동네를 떠난다 해도 그리움은 놓지 못할 거라고. 나는 그의 가슴속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그가 지나온 수많은 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처럼 아주 가느다란 어떤 길도 존재했다. 내가 그를 바래다주던 어느 밤의 평범한 그 길이.

 

p151<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너를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 <감각의 시절>, 이신조, 문학과지성사

첨단의 물리학 원리로 만들어진 '원자시계'가 정한 '세계협정시'의 표준 '1' '외부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세슘 원자가 9,192,631,770번 진동하는 시간'이다. 절대시간이다.

 

p157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전경린, 이룸

바다의 한천류에서 활유어로, 물고기에서 공룡으로, 원숭이로,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할 때마다 죽은 별의 재가 개입했어. 정확히 말하면 수소와 탄소와 산소, 칼슘 같은 원자들이지. 그러니까 우린 누구나 별의 아이들인 거야. 오늘 밤 우리가 볼 별들은 적어도 2만 년 전에, 어떤 것은 70만 년 전에 이미 죽어 우리에게 재를 넘겨준 아버지별이거든. 그 죽은 별의 빛이 우리에겐 영원의 시간으로 반짝이며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는 거야. 이 세상은 정말로 별의 꿈인지도 몰라.

 

p181

얼마나 오랫동안 원했는가, 또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였는가에 따라 손에 든 그것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그게 간절히 원한 것이라면 밥을 굶어야 하는 고통 따위는 잊게 만들 정도로 고귀하게 보일 겁니다. 그런 까닭에 한동안 그 물건에 푹 빠져서 살 수 있을 겁니다. 고생하면 고생한 만큼 그 물건은 영영 잊히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인생도 그런 식으로 기억되는 건 아닐까요? 그게 쇼핑이든 사랑이든 여행이든 대책 없이 저지르고 나면, 그리고 무모하면 무모할수록, 우린 그 일을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p200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들 지지 마시길.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사시길. 다른 모든 일에는 영악해지더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 앞에서는 한없이 순진해지시길. 지난 일 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우리는 여전히 우리라는 것. 나는 변해서 다시 내가 된다는 것.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자는 말은 결국 그런 뜻이라는 것. 우리는 변하고 변해서 끝내 다시 우리가 되리라는 것. 12 31일 밤,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선 겨울나무가 새해 아침 온전한 겨울나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다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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