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7. 14:01 잡다/본다
김현지, 청춘이라는 여행
예쁜 표지만큼이나
예쁜 감성과 언어가 담긴 책.
사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책 중 하나.
- 상상하는 것만이 내가 상대방에 대해 가장 많이 알 수 있는 순간이며 속을 들여다 볼 수록 그를 캄캄하게 모르게 된다는 것을.
- 아직 마음을 완전히 얻기 전의 미칠 듯한 갈망과 마음을 다 비운 후 빈손의 쓸쓸함. 연애에서 '사랑'은 딱 저 두 감정인 것 같다. 일상적인 데이트에 수반되는 달콤함과 고민이 아니라 연애의 전과 후에 오는 것이 나에게는 사랑이다.
- 커튼을 열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눈을 감자 모래 알갱이 같은 빛이 얼굴 안쪽으로 느껴졌다.
- 무슨 재미로 사나 싶은데 알고보면 참 재미있게 사는 사람, 평소 생활은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성실하지만 사실은 놀랄 만큼 열려있는 사람, 감추는 것은 없어 보이는데도 자꾸 궁금한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사람은 모두 자기 안에 괴물이 있다. 처음부터 보여주는 괴물은 금방 재미없다. 퇴폐와 심연과 허무와 고독을 껍데기처럼 둘러쓴 사람이 아니라 반듯하고 편평하고 부드러운 가운데 언뜻 보이는 괴물의 털북숭이 앞발. 그 앞발이 나는 좋다.
- 당신이 부재한 후에야 비로소 느껴지는 당신, 아주 차가운 바다를 지나온 후에야 만질 수 있었던 마음. 당신으로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공간 속으로 당신이 걸어들어왔어. 그제서야 알았어. 우리는 결코 따뜻한 봄날을 지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나의 차가운 겨울에 손을 잡아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다.
- 그런데 개의 귀를 접을 수 없는 책이 간혹 있다. 마음을 치는 한 문장, 영원히 그 울림 속에 갇혀 있고 싶은 시적인 구절이 없는 책. 그런데 이런 책은 어찌할 것인가? 모든 페이지에 개의 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책 전체가 개의 귀로 접혀야 하는 책. 그런 책들은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귀를 만들면서 이미 알아버린다. 더 이상 접을 필요가 없겠군.
책을 다 읽은 후엔 아이러니하게도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부분이 훌륭해서 전체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탓일까? 사실, 부분의 물리적인 총합이 아닌 화학적인 총합이 전체를 이룬다는 것은 예술과 삶이 가진 가장 놀라운 비밀이다. 그래서 완전함의 구현은 신의 영역으로만 남겨둔 채, 우리는 복잡계의 세계에서 헤맨다.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의 지상에서.
- 세계란, 기적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남루한 전체다. 혹은, 시끄러운 찰나들이 모인 적요한 호흡이다. 또다시. 빛나는 문장으로 채워진, 한 권의 가난한 종이책이다. 그러므로 또다시. 남루함을 직시하면서도 그 기적적인 순간을 느낄 수 있는 자들에게, 세계는 기적의 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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