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9. 20:41 잡다/본다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 지난 광안리 바다와 이번 광안리 바다, 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지, 나는 또 무엇을 새로 보고 또 무엇을 새로 들었는지. 눈을 감고 옛일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내게 남은 인생과, 또 다음 광안리 바다를 볼 때까지 그 인생을 가득 채울, 하지만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거기 저녁 바다는 여전히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갔다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랬듯이, 내가 죽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그 바다는 새로운 파도를 해변으로 보내겠죠. 다음 광안리 바다를 볼 때, 우리는 또 어떤 사람이 돼 있을지. 궁금증의 밤이 우리를 지났습니다.
- 안개 속이었다면 한 번쯤 길을 잃고 방황했어도 좋았을 것을. 그러라고 있는게 안개인 줄도 모르고.
- 허기를 모르면 맛도 모르는 법. 지금 원하지 않는다면 거기 무슨 사랑이 있을까나.
- 우리 모두는 사랑받아 마땅해요. 사랑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보석 같은 것. 거기 사랑이 보이지 않는 인생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지구와 태양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피를 생각하세요. 그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세요.
- 우리의 소망이 이뤄질 확률은 반반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될 일을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하든 안 됐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과 어떻게 하든 안 되는 일은 낮과 밤처럼 다르죠. 우리의 희망은 아마 낮과 밤의 그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을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노을만큼이나 희망은 아름답죠. 그건 우리 의지로 꾸는 꿈 같은 것. 돼지 꿈을 꾸겠다고 마음먹고 잠들던 어린 시절처럼 말이에요. 그렇다고 돼지꿈을 꾼 적은 한 번도 없었듯이 희망 역시 번번이 이뤄지지 못하고 밤의 어둠과 같은 절망이 찾아왔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일 낮과 밤이 바뀔 무렵이면 어김없이 보이는 노을 같은 것, 그게 바로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수천 번의 절망을 각오하는 마음. 그 정도 절망을 겪고 나면 혹시 그런 게 보일까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 풍경 같은 거.
- 내가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 유성은 상당히 실망했을 거에요. 바보 같은 소리라고 말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시를 읽어드리겠어요. 사랑의 원천은 새벽에도 깨어서 유성을 기다리는 눈동자 같은 것이라고.
- 어딘가로 날아갈 수밖에 없는 새들의 영혼처럼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지구의 속도처럼
조용히 멀미를 앓으며
저마다의 속도로 식어가는 별빛이 될 것이다.
- 벚꽃과 코스모스는 왜 평생 서로 얼굴을 마주볼 수 없는 사이가 됐는지.
- 그게 2010년 마지막 가을이었나봅니다. 몽타주도 그리지 못했는데 벌써 도망치고 없네요. 그래도 짜증 안 내길 정말 잘했어요. 이렇게 빨리 갈 줄 그땐 몰랐으니까.
- 대개는 밤이 아름다운 건 누군가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 골목도 모두 없어지고 다정하고 유쾌한 밤들도 지나가고 다시 처음처럼.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간은 여러 번 살 수 있다는 듯이. 다시 처음처럼.
-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불현듯 과거 속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언젠가 필리핀의 마닐라 뒷골목을 지나가는데 제가 대여섯살 무렵의 어느 여름밤, 우리 동네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포르투갈의 리스본 거리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들여다본 제과점 속의 모습은 어린 시절 우리 집 뉴욕제과점과 거의 비슷했어요. 언젠가 연해주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올려다본 밤하늘은 일곱 살 때의 밤하늘 그대로였구요. 그런 식으로 이 지구 어딘가에, 아니 어쩌면 이 우주 어딘가에 제가 살아온 삶이 그대로 저장된 것은 아닐까요? 별이 뜨는 것을 볼 때마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게 가뭇없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구란 이토록 크고, 우주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게 아닐까요? 인류의 기억 전부를 보존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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