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작가가 아닌 생활인 하루키, 젊은 하루키를 만난다 무라카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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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2

이런 예를 일일이 들어보자면 끝이 없다. 한마디로 바겐세일하는 레코드를 가리지 않고 마구 사들인 결과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둘쑥날쑥한 무작위함이 음악을 듣는 재미를 오히려 더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취향이 편협하게 치우치지 않은 것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나는 무슨 일이든 이런 식으로 우회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조금씩 찾아가는 성격이라, 무언가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고 실패도 잦다. 그러나 일단 그게 몸에 배면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딱히 자랑하는 건 아니다. 이런 성격은 자칫하면 남에게 상처를 주기 쉽고, 스스로 그 스타일을 교정하려 해도 마음처럼 잘 바뀌지 않는다. 남이 무언가를 권유하면 대부분은 듣고 흘려버리며, 남에게 무언가를 진지하게 권유하는 일도 잘 없다.


...


보통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란 스무 살을 경계로 점점 둔해지는 듯하다. 물론 이해력이나 해석 능력은 훈련에 따라 높아질 수 있지만, 십대에 느꼈던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감동은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유행가도 듣기 시끄럽고, 갈수록 옛날 노래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p.193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도쿄에서 가게를 꾸려나가는 한편 촌각을 아껴가며 소설을 쓰던 시절도 나름대로 무척 즐거웠다.

아마도 크레이그 토머스로 기억하는데, 그는 어느 소설의 후기에서 '대부분의 처녀작은 한밤중 부엌 테이블에서 쓰인다'고 말했다. 요컨대 처음부터 전업작가인 사람은 없으니까, 누구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이 잠들고 잠잠해진 후 부엌 테이블에서 갈작갈작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 

그러고 보면 나의 처음 두 소설 역시 '키친 테이블 소설'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가게 문을 닫은 뒤, 긴장을 풀기 위해 맥주를 한두 병 마시고, 그뒤에 우리 집 부엌 테이블에 앉아 소설을 썼다.


p. 그런 나의 개인적인 신조를 일일이 늘어놓았다간 꽤 길어질뿐더러 그다지 의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

하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그것은 '작가는 비평을 비평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다.

...

작가는 소설을 쓴다- 이것이 일이다. 비평가는 그에 대해 비평을 쓴다- 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난다.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인간이 각자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식사를 하고(혹은 혼자서 식사를 하고), 그러고는 잔다. 그게 세계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세계의 구조를 신뢰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전제조건으로 수용하고는 있으며, 트집을 잡아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트집을 잡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식사를 하고, 한시라도 빨리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들려고 노력한다. 내가 스칼렛 오하라는 아니지만, 밤이 밝으면 내일이 시작되고, 내일은 내일의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새벽의옥타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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