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1-11-2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당신이 사랑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것 30년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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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5

그래도 우리는 그 결론 없는 상황을 확실하게 그와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이 공유된다는 든든한 실감이 거기에 존재한다. 우리는 매장마다 그와 함께 난처해하고 곤혹스러워한다. 이것이 실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두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야아, 곤란하군요" "좀 난처한걸요"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네요" 하고 머리를 긁적이거나 수염을 만지작거리거나 팔짱을 끼는 것. 어디선가 빌려온 것 같은 결론을 들이대며 호언장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사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p.48

애당초 이런 다면성이 하나로 합쳐져서 안자이 미즈마루라는 사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측면이나 역할로 무리하게 규정하려 들면, 이 사람의 본질은 장어처럼 쏜살같이 어딘가로 스르륵 내빼고 만다.


p.76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의 모든 장소에서 이야기라는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줄곧 지켜왔습니다. 그 빛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든 그 빛으로만 밝힐 수 있는 고유한 장소를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의 시점으로 그 고유한 장소를 하나라도 더 많이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주위에 많이 있을 터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p.114

나이를 먹어서 좋을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젊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거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건 기쁜 일입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전보다 전체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혹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디테일에 불현듯 눈뜨게 됩니다. 그게 나이를 먹어가는 기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험은 인생에서 하나를 얻은 것 같은 흐뭇함에 젖어들게 합니다. 물론 반대로 젊을 때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나 문학도 있지만요.

나에게 음악이 가진 최대의 훌륭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차이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차이도 알고 중간 정도 차이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미묘한 작은 차이도 식별할 수 있죠. 물론 그것은 나한테 좋은 것, 나한테 나쁜 것이라는 뜻이니 그저 개인적인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인생의 질이라고 할 만한 것까지 크게 달라지게 만드니까요.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일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p.153

"나는 실제로 기억력이 아주 좋아. 그리고 일기는 쓰지 않지만, 내 일과 관련된 로그(기억) 같은 것은 꾸준히 기록해왔지. 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때 경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자료 같은 걸 만드는 느낌으로 계속 기록한 거지. 말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이런 곳에서 이런 사람들과 연주하고 이런 녹음도 했습니다' 라는 내용을 자기소개란에 쓰기위한 거였어. 그게 지금까지 오래도록 쌓여온 거지. 나는 그런 메모를 슬쩍만 봐도, 그때 광경이 눈앞에 선해. 세세한 부분까지도 생생하게 말이지.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글로 옮길 수 있는 거지."


p.180

노래가 내 마음의 문 같은 것을 힘껏 열어젖힌 것이다. 말로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노래에 나와 관련된 특별한 뭔가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한 차원 넓어지면서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도 뚫어져라 응시하면 보일 것만 같았다.


p.190

나는 지금도 그 12인치 음반을 가지고 있지만 솔직히 그렇게 자주 듣지는 않는다. 멍크의 음악은 여전히 좋아하지만 좀처럼 그 보그판이 레코드장에서 꺼내지지 않는다. 스무 살 직전의 내가 볕 하나만큼은 잘 드는 미타카의 아파트에서, 어떤 착오로 강제로 표백되어버린 듯한 기묘한 심경으로 하염없이 귀를 기울였던 멍크의 피아노 선율. 그때와 같은 울림은 더는 거기에서 찾을 수 없다. 내가 그 시대에 품었던 강물 같은 슬픔, 혹은 숨이 막힐 듯한 기쁨이나 사랑했던 사람, 이루지 못한 염원 같은 것들은 텔로니어스 멍크의 그 10인치 레코드 속에 흡수된 채 어느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사라져버리고 만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p.194

음악이든 글이든 뭔가를 꾸준히 창조해나가야 하는 고단함은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면 만들어진 작품에서 힘이나 깊이가 사라져버린다.


p.196

우리의 인생이란 기억의 축적으로 완성된다. 그렇지 않은가? 혹시 기억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지금 현재의 우리밖에 기댈 곳이 없는 셈이 된다. 기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떻게든 자기라는 존재를 하나로 묶고, 동일시하고, 존재의 중추 같은 것을 ㅡ 설령 그것이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더라도ㅡ 일단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p.204

뭘 해도 잘 풀리지 않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스스로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시기는 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의 인생에나 있게 마련이다. 존 레넌의 인생에도 이런 시기가 있었다. 내 인생에도 물론 몇 번인가 있었다. 스무 살 전후의 나날이 특히 그랬다.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이나 나나 좀 닮지 않았나요?


Isn't he a bit like you and me?


정말 그래, 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래도 존 레넌 씨가 그런 말을 건네온다면 어쩐지 조금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까?


p.210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가 끝난 후, 나는 바늘을 들어올리고 레코드를 재킷에 넣어 다시 진열장에 넣었다. 그녀는 남아 있던 위스키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마치 바깥 세계로 나서는 특별한 준비를 하듯 레인코트를 조심스럽게 걸쳤다. 그녀는 밖으로 나갈 때,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고 나서 "저야말로"라고 대답했다.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그 당시 나는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좀더 제대로 된 말을, 뭔가 좀더 확실하게 마음이 담긴 말을 건넸어야 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내 머릿속에는 도무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이별의 대부분은 그대로 영원한 이별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은 영원히 갈 곳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p.263

나는 기본적으로 고전이 될 만큼 뛰어난 명작은 몇 가지 다른 번역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적인 대응의 한 형태에 불과하므로 다양한 다른 형태의 접근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사람들은 흔히 '명번역'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매우 뛰어난 하나의 대응'이라는 의미이다. 유일무이한 완벽한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고전이라 불릴 만한 작품에는 몇 가지 얼터너티브가 필요하다. 양질의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해 다양한 측면에서 집적하여 오리지널 텍스트의 본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하는 것이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p.278

그렇게 또렷한 몇몇 이미지를 남기는 것이 역시 뛰어난 소설의 자격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읽을 떄는 감탄하고 혹은 나름대로 감동까지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아무런 이미지도 남지 않는 작품이 세상에는 결코 적지 않다.


p.326 - 327

독후감은 그때그때 상당히 달라진다. 다시 읽고 살짝 실망할 때가 있는가 하면, 새삼 재평가할 때도 있다. 같은 작가의 글이라도 A라는 작품이 B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시기를 경계로 B가 A보다 좋아지기도 한다. 그것은 소설뿐만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런 추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신적 성장이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적 정점을 외부에 두고, 그 정점과 자신의 거리의 변화를 가늠해봄으로써 자기가 설 자리를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문학 작품을 꾸준히 읽어나가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p.327

빈틈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포용력이 깊어질 성장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333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자기 자신을 향한 개인적 몰입을 보편적 몰입으로 부연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백'의 순수한 의미이며 궁극의 목적이다.


p.358

그리고 또 이 사람의 몸속에는 재미거리를 찾아내는 안테나 같은 뭔가가 어딘가에 갖춰져 있는 게 분명했다 나 혼자 돌아다녔으면 이런 재미를 발견하지는 못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재미있는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라기보다 '어떤 종류의 대상 안에서 특수한 재미를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p.405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운 덕에 악보를 읽고 간단한 곡 정도는 칠 수 있었지만, 물론 프로가 될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나의 음악 같은 것이 강렬하고 풍성하게 소용돌이치는 느낌을 받을 때가 곧잘 있었다. 그런 느낌을 어떻게든 문장이라는 형태로 옮겨낼 수는 없을까. 내 글은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p.445

내가 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느 정도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다들, 살면서 어떤 하나의 소중한 것을 찾아헤매지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혹시 운 좋게 찾았다 해도 실제로 찾아낸 것의 대부분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찾고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가는 의미 자체가 사라져버리므로' 라고 정리됩니다.



Posted by 새벽의옥타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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